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던 전시회. 위로를 받는게 이렇게 힘이 생기는 일이었구나를 새삼 깨달았던 전시회. 마크 로스코를 비롯한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은 사람들의 무관심을 바꾸고 싶어했다고 한다. <너 이런 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니>라고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이 엄청난 고독, 행복, 절망감, 순수함, 위로... 너도 똑같이 느끼는 거 알아, 뭔가 바꾸고 싶지 않니?> 라는 메시지를 주는 느낌이다. 

 

사람이 살면서 많은 갈림길을 만나고, 자의든 타의든 매번 선택을 하고, 프로스트가 이야기했듯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러는 삶들을 살아간다면, 마크 로스코는 마치, 딱 그러한 단 한갈래의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진 느낌이었다. 자살마저도. 작품 배치는 - 많은 개인전이 그러하듯이 당연히 - 일정한 특징을 나타내는 시기별로 구분하여 작품순으로 되어 있었는데, 마치 마크 로스코가 아주 당연히 나아갔어야 할 수순을 밟아나가는 느낌. 당연히 이 그림 다음엔 저런 그림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절실히 원하는 그러한 삶을 살았구나가 작품 순서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대는 작품들도 엄청 놀라웠지만, 전시작품 사이사이 붙어있는 설명에도 써 있듯이, <생명체를 만나는 기분. 마치 등을 돌리더라도 그 뒤에서 느껴지는 빛.> 이라던가 <뱃속의 태아가 커가는 신비>와 같은 그런 살아있는 느낌도 매우 놀라웠다. 그렇게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다른 각도로 자기의 역사를 담아 해석한다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마치 인격이란게 있어서, 변주만 달리할 뿐, 많은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느낌.  

 

처음 그림을 만나는 그 곳에서는 내가 한 때 제일 좋아했던 바흐의 무반주첼로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압도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살 전에 그렸다던 마지막 그림은 너무 강렬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에 별로 관람하지를 못했다. 명상을 할 수 있는 그 검은 방. 너무너무 맘에 들어서 하루 종일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시회를 다녀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감상평이 길어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그러는데, 이 전시회를 다녀오고서는 감상평도 한줄로 쓰고 싶었다. <미술 작품을 보고 기도를 하다니요..> 라고 딱 한줄 쓰고 싶었는데, 이렇게 길게 메모해 놓지 않으면 이 엄청난 집중, 단순함, 위로, 치유, 화합, 공동체, 존경, 겸손, 이런 단어들을 느끼는 강도를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서 좀 더 길게 써 봤다.

 

 

 

Posted by Econ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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